TRPG/후기

[레이디 블랙 버드] 180331 후기

sophrosyne 2018. 4. 8. 07:55

 

 

 

이하 접힌 문단에는 단편 인디RPG <레이디 블랙버드>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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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31일... 원래 이 날짜는 키미님과의 식사 약속이었는데, 키미님께서 이 날 그리핀베인님과 다른 분들을 모시고 RPG를 해도 괜찮겠느냐고 DM으로 물어보시기에 흔쾌히 OK를 했습니다. 레이디 블랙버드를 하신다기에, 잘 모르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단순하게 생각했지요. 그런데도 플레이에 무리가 없을 만큼 레블버는 직관적인 룰이었습니다. 이 부분은 나중에 조금 더 이야기하도록 하겠지만, 이 날 그리핀베인님이 가져오신 아르카딘님의 합의 카드(가칭)이 더해지니 시너지가 엄청나더라구요. 합의식 RPG에 대한 경험이 적은 저로서는 대단히 신선한 경험이었어요.

 

저는 집에서 신촌강남을 가나 천안을 가나 거리가 거기서 거기이기 때문에(...) 천안이라는 장소는 꽤 메리트가 컸어요. 대관은 구몬님이 하셨었는데, 개인적으로는 대관 장소가 정말 크고 넓어서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독립영화관을 겸하는 카페였는데, 세 테이블 정도는 들어갈 것 같더라고요. 이 날 처음 뵙는 분들이 있어서 조금 긴장했는데, 다들 좋은 분이셔서 좀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번 마스터인 그리핀베인님과 세션할 기회를 굉장히 기다렸는데, 이렇게 좋은 RPG로 만나게 될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정말 천혜의 모임이었습니다...

 

 

 

 

 

 

 

저는 잘 몰랐는데 레이디 블랙버드는 인디 RPG 어워드에서 수상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실제로도 룰과 배경 자체는 열 페이지 내외로 굉장히 간단한 편이고, 판정도 그렇게 복잡하지 않습니다. 다섯 명의 큰 목표는 같지만, 그 개인의 내면은 각각 '열쇠'라고 하는 욕망에 의해 지배됩니다. 이 열쇠는 캐릭터별로 다르고, 제가 맡게 된 공녀의 경호원 나오미의 내면은 공녀의 보호자로서의 자신과 제국에 대해 복수하고자 하는 자신, 그리고 격투가로서 더 강한 상대와 맞붙고자 하는 자신 이렇게 총 세 개의 욕망으로 대표됩니다. 이 내면에 걸맞는 행동을 하면 성장할 수 있는 경험점이나 예비 주사위를 받습니다. 

 

판정의 경우, 기본 주사위와 개인의 특성을 열거하여 상세히 묘사하는 것으로 추가 주사위를 받을 수 있고, 동료에게도 동의를 얻는다면 그들에게서 하나씩, 그리고 자신이 기본적으로 일곱 개 가지고 시작하는 예비 주사위도 원하는 만큼 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주 어려운 시련이라도 플레이어의 힘을 합하고 자신의 최선을 다하면 극복할 수 있는 시스템이죠. 

 

여기에 앞서 잠깐 말씀드린 합의 카드(가칭)가 진가를 발휘합니다. 된다/안 된다/제안이 있다 세 가지 내용으로 구성된 이 카드는 일종의 간이 투표 취합입니다. RPG판에서 최근 논의가 나왔던 X카드의 진화판이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합의식 RPG에서는 서로간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버리는 제안과 채택하는 제안을 엄격히 추릴 필요가 있는데, 그 안전장치로서 대단히 유용하게 기능합니다. 그리핀베인님이 가져오신걸 보여주셨을 때는 오, 괜찮다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겪어 보니 괜찮은 정도가 아닙니다. 이런건 영업을 해야 됩니다... 두 번 쓰세요 세 번 쓰세요. (링크

 

 

 

 

레이디 블랙버드의 세계는 와일드 블루라고 불리는 창공입니다. 스팀펑크풍의 세계에서 비행선이 날아다니며 부유하는 대륙들을 왕래합니다(하늘오징어도 있습니다! 길이가 무려 139미터나 됩니다). 세계는 제국과 자유세계로 양분되어 나름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제국의 블랙버드 공녀 나타샤 시리는 칼로위 백작과의 정략결혼에서 도망쳐 자신의 애인, 해적왕 우리아 플린트에게 향가기 위해 올빼미 호(공식명칭이 부엉이 호더라구요.. ) 의 선장 사이러스 반스를 고용합니다. 그 배에는 정비공 케일 아캄과 고블린 파일럿 스나글도 선원으로서 함께하고 있습니다. 

 

제가 플레이한 나오미 비숍은 블랙버드 공녀, 나타샤 시리를 충실하게 보호하기 위해 동행하는 캐릭터입니다. 주어진 설정은 여기까지지만, 이 이외의 설정은 자신이 자유롭게 덧댈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션의 나오미는 어두운 피부에 머리를 모두 뒤로 넘겼으므로 겉으로 보아서는 성별을 구분할 수 없고, 남성으로 패싱됩니다. 또한 공녀의 곁에 서기에 손색이 없는 품위있는 택티컬 수트를 착용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나오미 비숍은 그녀의 본명이 아니고 공녀들을 호위하는 가명의 총칭, 그러니까 어떤 직위에 가깝습니다. 어쨌든 그녀는 나오미로 불리지만요.

 

 

 

 

이야기를 제자리로 돌려서, 나타샤가 반스를 고용한 건 좋았는데 이 올빼미 호가 가라깃발을 다는 바람에 제국 순양함에 구금됩니다. 다행히도 나타샤의 정체는 들키지 않은 모양이지만, 여기서 탈출해야 하는 건 분명한 상황입니다. 여기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올빼미 호는 위에 있고, 일행은 순양함 아래 제국이 군용으로 훈련할 예정(으로 추정되는) 새끼하늘오징어와 함께 그물망 형태의 새장 같은 것에 매달려 있고... 어찌저찌 나타샤의 마법을 위시해 각자의 능력을 사용하여 탈출에 성공하고 제국군 병사를 때려잡고 하면서 비행기를 띄웠지만 이번에는 올빼미 호의 연료가 부족합니다.

 

일행은 결국 잔해지대로 가기 위해서는 헤이븐이나 나이트포트, 자유세계의 두 개의 도시 중 하나를 들러야 된다는 결론에 다다릅니다. 일행들의 의견은 당연히 갈라질 수밖에 없겠지요... 왜냐하면 헤이븐은 그 자유로움 사이에서도 규칙을 세우고자 하는 곳이고, 나이트포트는 무엇이든 거래되는 회색지대이기 때문입니다. 나오미는 나타샤의 안위를 위해서 나이트포트에 가면 안 된다고 주장하지만 고블린 타운이 있는 헤이븐으로 가고 싶어하는 스나글을 제외한 셋은 나이트포트에 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다수결은... 이길 수 없습니다...

 

 

 

 

 

나이트포트로 가는 동안, 서로가 회복할 시간을 가집니다. 아주 오랫동안 나타샤를 짝사랑했던 반스는 동료 케일의 조언을 받아 코코아 두 잔을 들고 나타샤에게 향합니다. 그녀에게 잘 보일 좋은 기회니까요. 하지만 우리의 나타샤는 코코아 한 잔을 받아들고 자연스레 나오미에게 넘기고 자신의 잔을 반스에게 또 받습니다(...). 아무래도 좋은 시간은 물 건너간 것 같고 반스는 케일에게 하소연하는데... 이 장면이 너무 웃겼습니다. 약간 도O에몽을 찾는 듯한...ㅠㅠㅠㅠㅠ 아무래도 눈치를 깐 나오미는 반스와 대련을 하는데, 혹독한 주먹을 통해 공녀에게 헛짓거리를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 라는 뉘앙스를... 확실히 전달합니다.ㅋㅋㅋㅋ 그 동안 나타샤는 파일럿 스나글과 비행선에 대해 이런저런 대담을 나누고요.

 

 

 

 

나이트포트로 향한 일행들. 나이트포트는 자전하지 않아서, 한쪽은 늘 밤이고 한쪽은 늘 낮입니다. 이 밤인 면에서는 무엇이든지 거래가 가능한 것이죠. 선장 반스가 시세를 알고 왔다고 거짓말을 하며 이 삼 층짜리 고블린(...)을 상대로 연료값을 흥정하는 동안, 케일이 여분의 연료를 훔치지만... 고블린 스나글의 양심이 걸림돌이 됩니다. 딱 걸린 일행들은 방해하는 아군 스나글을 발에 매달고(...) 간신히 탈출에 성공합니다. 

 

연료는 어떻게 구했지만, 잔해지대는 수많은 파편들이 널브러져 있고 전파가 혼선되기 일쑤인 곳이라, 정확하게 우리아 플린트가 있는 장소를 알아낼 필요성이 생겼습니다. 수소문을 하다 보니 어떤 자가 단서를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이 친구가 또 자기 말을 안 듣는 자는 개로 바꿔버리는 연금술사 같은 흉악한 놈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그를 만나고 딜을 잘 해서, 우리아 플린트의 쌍둥이이자 오른팔인 D 에이스(...)가 있는 구금시설에 대해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잠입뿐이죠. 비행선을 타고 그곳으로 올라가는 궤도 엘리베이터를 부순 뒤 위쪽으로 올라갑니다. 각자 에이스가 있는 곳을 찾기 위해 스나글과 케일, 반스 이렇게 셋과 나타샤, 나오미 이렇게 두 팀으로 갈라집니다. 그 때 아주 유연하고 유능한 우리의 스나글은 방해꾼인 제국 병사들을 조지며 어디론가 폭 빠져버립니다. 계속 내려가다 보니 에이스가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었는데, 거기에 스나글도 공허거미에 붙잡혀 있었어요. 나타샤가 에이스를 구출하는 동안 나오미는 공허거미를 밟으며 스나글을 구출하려고 애쓰지만... 그만 실패하고 큰 부상을 입고 맙니다. 

 

그때, 위에서 함대가 진입합니다. ...칼로위 백작입니다. 나타샤는 칼로위 백작과 딜을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힘든 상황이죠. 일행은 그의 함대에 구금됩니다. 나타샤는 공녀이기 때문에 험한 대접을 하지 않지만, 올빼미 호의 선원들은 갇혀서 밥도 못 먹는 슬픈 사태가 벌어집니다. 그 와중에 칼로위가 이 배는 잔해지대로 향하고 있으며 그곳을 무차별 폭격해, 우리아 플린트를 없애 버릴 것이라고 선언하는데... 그를 막아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겁니다. 

장면을 바꾸어, 식사를 마친 칼로위는 전직 제국군이었던 반스와 거래를 합니다. 해적으로서의 모든 것을 청산시켜 주고 제국군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 주겠다고. 반스는 자신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동료들을 생각하고 그 거래를 받아들입니다. 그 증거로서 반스가 옛날에 사용하던 제국군 마크가 박힌 두 자루의 총을 돌려받습니다. 방에 돌아온 케일과 스나글은 반스에게 자초지종을 묻지만, 반스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이 때 케일은 해적왕 우리아의 심복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자고 결심하게 됩니다. 반스의 의형제로서의 자신을 버리고요. 이 때 구몬님의 케일이 반스를 부르는 호칭이 형님에서 선장님으로 변하는 게 너무 좋았어요. 이 때 반스의 플레이어인 멘마맨님이 머리를 깨시는 게 정말 재미있었는데요... 제가 바로 다음에 머리를 깨게 될 줄은 모르고... 

 

공녀가 식사를 가져다 주며 어찌저찌 스나글의 꾀병 작전으로 탈출이 가능한 듯 보였으나... 올빼미 호 앞에는 제국군과 칼로위가 진을 치고 있습니다. 노래를 불러 군용 하늘오징어를 끌어들인 후 자폭 장치를 발동했다고 말하는 칼로위를 보며 나오미는 자신의 일족을 노예로 만든 제국에 대한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낍니다. 이 때 모든 주사위를 원기옥처럼 모아서 칼로위에게 가장 강력한 한 방을 날렸어요. 다들 도와주시기도 했고 예비 주사위를 아낌없이 털어넣었더니 완전 원펀맨이 됐습니다. 그러나... 칼로위의 찢어진 옷 사이로 보이는 노예의 문신을 보고 나오미는 절망합니다. 칼로위 역시도 노예 출신이었던 거죠. 죽어가는 칼로위가 이 배의 자폭장치는 진정한 귀족만이 끌 수 있다고 말하고 눈을 감고... 진정한 귀족, 우월자 나타샤 시리는 자폭장치를 멈추기로 합니다. 반스와 케일, 나오미는 이 곳에 남고 스나글은 우선 올빼미 호를 타고 먼저 탈출합니다. 케일에게 해적이 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은 나오미는 조금 망설이다가, 나타샤에게 당신의 보호자를 그만두겠다고 말합니다. 

 

정말 드라마틱하게도 이 때 딱 주사위 성공 수가 맞게 나왔던 기억이 나요. 모두가 아낌없이 협조주사위를 내밀었고 필사적으로 특성을 고민하시던 키미님 모습이 생각납니다. 자폭 장치는 나타샤에 의해 멈추고, 함선은 잔해지대, 우리아 플린트가 있는 곳에 진입합니다. 이 때 스나글의 양심은 저 극악한 해적을 없애자고 결심하고... 올빼미 호를 우리아가 있는 곳에 갖다박습니다. 이 때의 황충님의 광기... 역대급이었습니다(사실 전 너무 웃겼음). 당연히 나머지 일행들은 방해하고... 우리의 스나글은 실패하고 어디론가로 떨어집니다. 드디어 나타샤는 극적으로 우리아와 만났지만...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죠. 어릴 때의 환상만 가지고 사랑하기에는 우리아는 너무 오래 나타샤를 방치해 두었습니다. 나타샤는 우리아의 뺨을 때리고 내가 당신을 구한 건 당신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키미님 이 때 RP 정말정말 좋았어요... 

 

그렇게 우리아를 찾는 여정은 끝나고, 나타샤는 반스와 함께 제국으로 돌아갑니다. 반스의 희망 없을 것 같았던 사랑은 사실 맞관이었던 거죠. 나타샤는 후에 군을 이끌게 되고, 반스는 그 옆에 있을 겁니다. 이 때 대사 복선 회수가 정말 오졌어요. 아... 짱이다... 나오미와 케일은 해적이 되어 노예제 철폐를 위해 힘쓰게 됩니다(추상적 설명.) 그리고 우리의 스나글은... 놀랍게도 자신의 옛 동료를 우연히 다시 만나 새로운 함선에서 새로운 모험을 시작합니다. 해피엔딩 해피엔딩~!

 

 

 

 

 

앞서도 적었지만 저는 합의식 RPG 경험이 적은지라, 이번 플레이가 대단히 신선하고 재미있었어요. 플레이어에게서 자연스럽게 아이디어를 이끌어내는 모습이나, 판정이 실패하건 성공하건 이야기의 흐름을 끊지 않고 자연스럽게 상승으로 이끄는 그리핀베인님의 마스터링 기량이 솔직히 좀 감동적이었습니다. 합의 카드(가칭)이 정말 적절하게 이용되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스팀 펑크 풍의 배경도 대단히 매력적이라, 이어지는 다른 시나리오가 있다는 말에 솔깃했지만 레블버만은 못하다는 말에 다시 시무룩. 앞으로도 이런 완성도 높은 단편 RPG가 많이 나왔으면, 또 제가 플레이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좋은 자리에 초대해주신 키미님, 구몬님, 마스터 그리핀베인님, 함께해주신 황충님, 멘마맨님 모두 감사드려요. 정말정말 즐거웠고 기분 좋은 플레이였습니다. 다음에 또 뵈어요!